상고와 묵상
행위에 관하여: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 2:13) 본문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요일 3:7-8a)
개신교 교리의 중심말씀이라면 단연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갈 2:16)"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율법의 행위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우리는 깊히 성찰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그저 "행함으로는 의로움을 얻을 수 없다"는 단편적인 해석에 그치고 만다.
이제 우리의 이해를 전복시키는 말씀 하나를 살펴보자. 바울이 직접 쓴 글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 2:13)" 이제 우리에게는 풀어야 할 퀘스천마크가 떠오른다. 율법을 행해야 의롭다는데...?
이 난제의 열쇠를 나는 마태복음에서 찾는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바는 지키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 23:2-3a)"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이어지는 말씀에 나타나 있다. 그들은 말만하고 행하지 아니하며(23:3b),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기(23:5) 때문이다. 나는 이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행위"가 바울이 말한 "율법의 행위"가 말하는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의를 행할 때에 의롭게 된다. 그러나 그 동기가 "사람에게 보이고자 함"에 있다면, 우리는 의로워질 수 없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롬 2:28)”
이것은 대단히 도전적인 해석이지만, 최근의 신학계에서는 조금씩 이러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권연경 교수는 율법의 행위라는 표현이 "할례에 대한 헛된 열심이 야기하는 도덕적 공백을 겨낭한 것"이라고 지적한다¹. 톰 라이트는 이것을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분 짓던 행위"라고 풀이한다². 소위 "바울의 새 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이라는 부르는 학파의 목소리다.
해석의 결은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적인 강조점은 2가지이다. 첫 번째는 행위의 본질적 이유를 도외시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행위의 목적이 보여주기에 있다는 점이다. 권연경 교수에게 그것이 도덕을 외면하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외적으로 보이기 위한 할례라면, 톰 라이트에게 그것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하나됨을 방해하고 이방인과의 구별을 보이기 위한 외적인 율법준수다.
마르틴 루터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며, 그가 납득할 수 없었던 야고보서를 비롯한 4권의 책을 부록으로 빼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를 외치는 개신교를 궁색하게 만드는 어두운 역사다. 정경의 일부에 그림자를 드리워야 자연스럽게 해석할 수 있는 교리라면, 그 교리는 재고되어야 마땅하다. 교리가 성경의 증거를 앞설 수는 없기 때문이다. 루터가 그토록 숨기고 싶었던 야고보서는 선명하게 말한다: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약 2:18b)"
¹ 권연경. (2006). 행위없는 구원? (p.151). SFC.
² N. T. Wright. (2016).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 (최현만, 역. p.182). 에클레시아북스. (Original work published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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